[지난 연대기 다시보기]
1. 당연한 질문, 당황스러운 답변
고객사로부터 백업 현황 보고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운영의 기본 중의 기본인 현황 파악. 저는 제가 정리한 자료와 백업 담당자의 자료를 대조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눈을 의심케 하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VMware 기반의 VM 백업 항목에 **'백업 없음'**이라고 체크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요.
VMware 환경에서 .vmdk 파일을 스냅샷 기반으로 백업하고 있다면, 그것은 시스템 전체를 아우르는 명백한 이미지 백업입니다. 의아한 마음에 담당자에게 물었습니다. "이거 백업이 없다고 체크하셨던데, VM 백업도 엄연히 백업 아닌가요?"
담당자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제 예상의 범주를 한참 벗어났습니다. "글쎄요, 이건 제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요. 팀장님 오시면 물어봐야 합니다."
그 순간, 예루살렘 성벽이 허물어지고 성문들이 불탔다는 소식을 듣고 주저앉았던 느헤미야의 심정이 스쳤습니다. 인프라의 성벽이 무너지고 있는데, 파수꾼은 그저 결재판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2. 기술적 판단인가, 행정적 결재인가
백업 담당자가 '무엇이 백업인지'를 정의하지 못해 팀장의 결재를 기다려야 한다니. 데이터의 무결성(Integrity)은 팀장의 기분이나 정치적 판단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구가 가능하고 데이터가 보존되고 있다면 그것은 기술적으로 명백한 '백업'입니다.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 앞에서 기도하며 확신을 가지고 필요한 재목과 조서를 요청했습니다. 그는 관리자의 허락을 구걸한 게 아니라, 성벽 재건이라는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전문가적 판단'을 던졌습니다. 하지만 현장의 엔지니어는 전문가의 '판단' 대신 관리자의 '허락' 뒤로 숨는 것을 택했습니다. 기술적 팩트가 행정적 결재 서류로 전락하는 서글픈 순간이었습니다.
3. 팀장의 일침, 그리고 씁쓸한 뒷맛
잠시 후 돌아온 팀장의 반응은 예상대로였습니다. "야, VM은 백업도 되고 복구도 다 되잖아. 당연히 백업이라고 적어야지."
팀장의 시원한 대답에 상황은 일단락되었지만, 제 마음속엔 묵직한 질문이 남았습니다. 10년 넘게 이 바닥에서 밥을 먹었다는 저 담당자에게 '기술'이란 무엇일까요. 그에게 백업은 시스템을 보호하는 최후의 보루가 아니라, 그저 위에서 시키는 대로 체크박스를 채우는 **'행무(Administrative Work)'**에 불과했던 것일까요. 그는 성벽을 쌓는 자가 아니라, 그저 품삯을 받는 일꾼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4. 에필로그: 이름뿐인 전문가들의 시대
차세대라는 거창한 이름 아래 수많은 고사양 장비가 들어오고 복잡한 솔루션이 깔립니다. 하지만 그 도구를 다루는 사람의 사고방식이 수동적인 '기능공'에 머물러 있다면, 그 시스템은 모래성 위에 지은 궁전과 같습니다.
자신의 직무에 대해 스스로 정의 내리지 못하는 전문가. 우리는 그들을 전문가라 부를 수 있을까요. 18년 차 아키텍트인 저는 오늘 다시 한번 다짐합니다. 기술자의 자존심은 관리자의 컨펌(Confirm)이 아니라, 자신이 쌓고 있는 성벽에 대한 **'거룩한 책임감'**에서 나온다는 것을 말입니다.
[다음 이야기 보기]
"장애도 아닌데 왜 물어봐요?"
기술적 의문을 던진 후배에게 날아온 선배의 서슬 퍼런 일침. 원인을 모르는 '정상'은 비정상보다 위험하거늘, 그 오만함은 성벽의 빈틈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100% 가득 찬 파일시스템보다 더 숨 막히는 선배 엔지니어와의 충돌을 다룹니다.
인프라 연대기 #3: i-node의 빈틈과 스토리지의 오만, 성벽은 안에서 무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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